[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2007년에 바치는 작별인사.

가슴의 한쪽을 칼로 베어버렸다.

절대 포기할 수 없고 한번 돌아서면 돌아오지 않는다는것을 아는데도 단칼에 베어버렸다. 알았다.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을 내 손가락 사이로 사막의 모래마냥 흘러가게 두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집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내 삶의 모든것이었고, 내 목표와 안식처였던것을 상처입고 겁먹은 눈으로 그렇게 포기했다.

2007년은 시작부터가 독했다. 사랑의 열병은 물론이고 '나'라는 작은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려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밝은빛은 끝까지 보이지 않을것만 같았다. 눈에는 눈물을 달고 살았고 술도, 담배도 하지 못하는 내 몸은 한없이 스러져만 갔다.그리하여 여린 내 가슴만 손으로 내리칠 뿐이었다. 내 작은 방의 촛불이 사그러들 즈음이면 나는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길 바랬다.

곽세라처럼 나도 짐을 쌌다. 그녀가 관 속에서 입었던 하얀 블라우스를 떠올린다. 한 때 사랑하던 이가 미친듯이 입맞추던 그가녀린 목. 죽을때 마지막으로 떠오를 그 기억. 하지만 그랬다. 사랑이 증오가 되고, 후회가 되고,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찾아오는건 어쩔줄 모르는 내모습. 하지만 그렇게도 살아진다는게 제일, 제일 슬펐다.

나는 계속 가녀린 갈대처럼 삶에 흔들렸다.

결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한다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지고가야 할 삶의 무게는 딱 그만큼이었으니까. 사람들과 오가는 말의 안에 내가 없었고 맛있는 음식속에 포근함이 없었다. 정말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고 여러곳에 나의 흔적을 두고왔다. 어떤 정신으로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있다.이 낯설고도 친근한 곳에 이렇게 건강하게 존재한다. 결국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신은 나를 그리거칠게도 몰아쳤는지 모르겠다.

'행복하지 않은 일이라면 하지마라. 그곳에서 너를 구출해내라.'

2008년에 내가 얻은것은 이것 딱 하나다. 종교적이지 않아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난 이제 내가 밉지 않다. 그래서 당신도 미워할 수 없다. 더욱 민감해진 내 몸과 마음이 삶의 가야할 길을 알려주어 더이상 외로워도 괴롭진 않다.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지만, 나, 낯선 나라의 골목길에서 우연히라도 당신을 만나면 감히 안아주련다. 내 튼튼한 팔과 넓은 가슴으로그렇게 안고 오랫동안 보듬어주련다. 이젠, 그럴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도 생각하지 않는대신 그냥 그렇게 놓아주길. 나를 버림으로서 얻은 당신의 삶을 당신만큼 사랑하길. 용서해요.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by 이정희 | 2008/01/15 20:08 | 2007 두바이 | 트랙백 | 덧글(2)

[프롤로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빛나는 눈은 반짝'

'지금 어디야?'

'벌써 한국을 떠났다고?'

'뭘 그리 정신없이 돌아다녀. 이번엔 얼마나 있을건데?'

엠에센에서, 블로그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과 친구들은 나에게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넌 지금 어디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거니. 그 질문에 뭐가 그리 궁금할까 하는 눈으로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나에겐 그런 궁금증을 가지는 그들이 오히려 더 신기하다. 그런데 나,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싶은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꿈이란 녀석과 나도 모르는 수 많은 것들에 대해 그럴듯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던지는 모든 질문에 시원스럽게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계속 여행하듯이 살 이유도 없을 것이다. 때로는 마음이 시켜서 했구요. 사실 대부분은 마음이 아파서 방황하느라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어요.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미친듯이 울적해 떠난 여행도 있구요,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서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가끔은 이게 운명이란 생각도 들고요, 더 우울할때는 이게 내 팔자인가 싶어요.

홍길동 외계인 고양이 같은 여자 이방인 집시 유목민 마녀

사람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들이다. 긍정적인 것도 있고 묘한 구석이 있는 단어들도 있다.

나름대로 특이하다는 내 삶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어서' 따위의 거창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침묵한다. 그러면 멋있다, 부럽다, 대단하다, 자유롭게 산다, 독하다, 혼자 고생이 많다, (혹은 시집은 대체 언제 갈거냐 등등) 다들 자신의 생각대로 나에게 말을 던진다. 그럼 난 그들의 말을 곰곰히 듣다가 마음속의 노트 한장을 부욱 찢는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포기하거나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것

- 돈
- 심리적 안정감
- 엄마가 해주는 밥
- 어디에 '속한다'는 느낌
- 고정된 주소와 전화번호
- 이쁜 내 동생들을 보는 일
- 남자친구와 만나도 언젠간 헤어질지 모른다는 부담감
- 만나서 친해질만 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세계 여러곳의 친구들
- 듬직한 신랑과 하는 결혼에 대한 꿈과 아주 가끔씩이지만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구
- 교복을 입고 떡볶이 사먹는 학창시절의 추억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창회
- 외국에서 길가다가 살인마나 나쁜놈을 만나면 대사관에서 나를 과연 보호해 줄까 하는 망상

머리속에 열심히 리스트를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다들 내 일상의 모험담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럼 왜 그렇게 살아. 너도 남들처럼 살아봐. 이젠 그렇게 살지 말고 정착해야하지 않아? 근데 문제는 나는 살기위해 여행하는 것이지 여행하려고 살고 있는것은 아니라는거다.

언제부턴가 여행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그냥 나에겐 이것이 일상이다.

이런 평범한 나에게도 정말정말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말이 굉장히 많다는 거다.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입만 열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스토리텔러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곳에 가서 낯선 얼굴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지구 반대편 어디엔가 나와 같은 붉은 피가 흐르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들을 모두 만날 수 없다는게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기는 너무 아까우니 꼭 모두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세헤라쟈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다. 그녀가 지금 살아있다면 난 그녀의 침실 벽에 파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그녀의 이야기를 훔쳐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것 마냥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담을 펼쳤을게 뻔하다. '에헴. 이건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인데 말야..' 근데 공교롭게도 난 지금 세헤라쟈데가 살았던 그곳으로 시속 80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가는 중이다.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많이 웃어줄까나.

2007년 12월 10일
두바이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by 이미희 | 2007/12/10 10:15 | 2007 두바이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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